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소의 난 (문단 편집) == 전개 == 당시 한족들은 간신들에 의해 농민으로 격하되는 일이 많았고 격하된 농민들은 성씨는 가지고 있었으나 소작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이민족 군사들에게도 급여를 주기 위해 신분차별을 더욱 심하게 하였고 수 많은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며 노역에 시달렸다.마침 희종 원년에 대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하남성]]과 [[산둥성]] 접경 부근의 소금밀매업 을 하던 귀족이였던 왕선지(王仙之)는 실업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왕선지는 소금밀매를 하면서 벌은 막대한 돈을 뿌려 쉽게 병사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이윽고 이번 사건의 주인공, [[황소(당나라)|황소]]가 [[산둥성]]에서 호응하면서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커진다. 그런데 둘의 군대가 하나로 뭉쳐 산동과 하남 일대를 공격하자 당나라군의 어그로는 최대치로 증가했다. 결국 둘은 군대를 나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진군하기로 하지만 서쪽, 즉 낙양을 향해 나아가던 왕선지는 당나라 중앙군의 강력함에 놀라 벼슬을 주겠다는 당나라에 항복했다가 다시 당을 배신하여 관군에 저항하다 패배하여 전사했고 그의 목은 희종에게 바쳐진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한 채 황소에게로 도망쳐온 왕선지군의 패잔병들은 황소 부대와 합류하여 황소를 왕으로 추대했다. 황소의 군대가 하나로 합쳐져 다시 하남성 일대를 향해 진군하려 하자, 당나라는 즉시 낙양 일대로 수십만 대군을 소집하여 황소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다. 황소는 이 정보를 듣자 중앙군을 치지 않으려는 심플한 생각으로 하남진군을 포기하고, 남하한다. ||[[파일:external/blogfiles2.naver.net/zd.jpg|width=100%]]|| || 황소 반군의 진격로. || 남쪽으로 광주([[광저우]])까지 이르렀던(여기서 외국 상인들이 거의 제노사이드 수준의 피해를 당했다고도 한다) 황소군은 남부에 전염병이 돌자 이를 계기로 북상하고, 천년도 더 뒤의 [[대장정]]을 방불케 하는 6년 간의 대모험 끝에 880년, 충천대장군(沖天大將軍)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동관(당나라의 수도 [[시안(도시)|장안]]의 코앞)을 점령한다. 이렇게 되자 수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관리들은 도망가고 희종마저도 [[성도]]로 피신하기로 결정한다. [[파일:external/cfs2.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JHT3p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zUuanBnLnRodW1i&filename=75.jpg]][br]▲[[장안#s-1]]에 입성하는 황소 며칠 뒤, 장안의 서문으로는 당나라 황제가 빠져나가고 동문으로는 백성들의 환호와 함께 황소가 무혈입성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다. 수도 장안이 함락당한 것이다. 군기를 엄중히 하여 장안성의 민심마저 자기 것으로 만든 황소는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하여 황위에 올라선다.[* 다만, 이때 황제 즉위식을 하는데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죄다 도망쳐 숨어버리는 바람에 병사들이 [[북(악기)|북]]을 수백 번이나 울리는 방식으로 즉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장장 7년간의 대장정 끝에 그가 천하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